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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나, 서울아트시네마, 그리고 지금.

나는 씨네필이 아니다. 고백컨데 나는 영화보다 극장을 먼저 좋아했다. 언제부턴가 그 어두운 공간에 늦은 밤 혼자 찾아가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20대 나의 전부였던 공간은 사실 교회였다. 수업과 레포트보다 그리고 직장보다 교회와 전도의 일이 나에겐 최우선순위였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던 공동체에서 힘들어지던 순간은, 이 공동체가 내 개인의 삶과 맞물리지 못한 채 흘러가고 있다고 느껴지면서 부터였다.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양육을 하는데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계속 치고 올라오고, 공동체는 끝없는 헌신을 요구하는데 내 삶은 어느순간 저기 내팽개쳐져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나를 돌볼줄 몰랐다. 그것은 공동의 목표에 비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했었다. 아니 나는 그것을 공동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느꼈는데 정작 내 현실위에 아무런 것이 되돌아오지 않는 순간은 늘어만 갔다. 무엇보다 나는 나를 이해받는다고 느꼈던 시간들이 멀어져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일한 내 위로는 늦은 밤 예배당에 홀로 찾아가는 일이었다. 나는 말을 걸고 혼자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기도. 그리고 목소리 그리고 눈물. 종교행위를 하는 누군가를 뒤에서보면 정신나간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독백속에 혼자 취한 뒷모습들. 그건 절실한 고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내 눈의 영에서 행해지던 그 절실함들을.

 

교회를 떠나서 극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서 늘 생각하는 것의 2-30퍼센트 정도만 전달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세상의 소음은 말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가족 그리고 교회공동체에서 말들(소문)로 인한 상처를 겪었다. 그것은 그곳을 나왔다해도 지워질 수가 없는 흔적이다. 이런 상황들이 홀로 선 나를 더 무의식적으로 갈증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극장에 가면 감독이 직접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고 환영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떤 시공간이 있다. 내가 이 현상을 왜 만나고 있고 이 이야기에 왜 빠져들며 그것은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나는 극장이라는 집단적인 공간에서 모두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상태, 그 침묵의 상태에서 동일한 상을 만나는 그 상태가 좋았다. 마치 모두가 평범해지는 것 같았다. 선후배도, 직장 상사도 함께 간 모든 사람들이 그 영화를 대하고 나서는 공감대를 느끼려고하지 우위를 점하거나 명령하려고 하지 않았다. 강요나 헌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원죄의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렇게 한없이 작은 나라는 존재에게도 동일하게 이 현시적인 느낌을 있는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을 결코 서슴치 않았다. 뭐랄까 너무 순수하게 열정적이었다. 그것은 집단 이데올로기와는 달랐다. 그것은 나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touch를 했다. 그것이 내가 영화를 만난 방식이다. 지금은 자리를 옮긴 필름포럼에 지아장커의 다큐멘터리를 보러 왔다가 우연처럼 라울월시 회고전을 하고 있는 아트시네마를 만났다. 나는 고전영화라고는 아는 것도 본것도 많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화들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일을 마친 후에 나는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이미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그 불안하기만 했던 시절에 말이다. 프리츠 랑의 빅히트를 보는데, 흑백영화를 스크린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영화의 느낌을 또렷이 기억한다. 영화와 나와의 시간은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영화안에 이미 빠져들어가 있었다. 개봉영화를 볼 때의 약속된 가학성과 달랐다. 머리속으로 계산하고 있는 영화값과 기타 기회비용, 그리고 그에 향응하는 영화의 스펙터클을 요구하던 내 머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영화들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그 무엇도 그 영화와 맞바꿔지질 못했다.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프로그래머님이 나와서 하시는 말중 반복되는 것이 있었다. '언제 다시 살아생전에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충격이었다. 영화는 언제고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소비품이라고 여겨온 나에게 커다란 정신적 쇼크를 남겼다. 그 때부터 나는 이곳에서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들이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영화는 졸기도 하면서도 귀만은 쫑끗이 살아서 소리들이라도 담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들이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갑자기 슬퍼졌고 또 두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고 무식한 기록들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영화는, 나같은 공허한 자를 허락해주는 이 영화는 진정 평등이다. 영화는 진정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물아홉부터 지금까지. 근 2-3년간 내가 직장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이곳이다.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지금 내가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는 그것, 우리는 고백하는 것보다 우리의 실제 생활의 양식에서 그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나는 직장에서 계약만료당했다. 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는 내게 직장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동안 밥도 못사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상하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위로도 주질 못했다. 직장에서 위기에 몰렸던 순간 싸늘하게 등돌렸던 사람들이 갑자기 악수를 청하는데 그들의 손이 낯설었다. 나는 울음이 났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라기보다는 내 무능력한 현실과 이런 상황에서도 이악물고 살아나가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슬픈 감정들의 복합체였다. 나는 그 사람들이 한 말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들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하나 불공정한 위기상황에서 나를 대변해주지 않았던 상황은, 그들로서는 삶의 어쩔수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의 위기를 감수시킬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오는 이순간, 내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쇼핑백 달랑 한꾸러미였다. 내 짐이 이렇게 슬프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3년을 넘게 근무한 곳에서 나는 가지고 나올 것이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월급을 받아챙겨먹은 것 말고는 마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보였다. 내 존재감. 그것이 이렇게 잊혀지는것이구나. 그것은 시간속에 사라지는 것이구나. 내 자리는 누군가가 와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것이다. 내 명패는 바뀌고 내 향기도 잊혀질 것이며 내 목소리는 새로운 목소리로 덧입혀질 것이다. IMF위기에 대규모로 늘어난 계약파견직의 일자리는 임기응변이 아니라 고정적인 일자리가 되어버렸다. 그 제도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만일 그 자리에 상근직원보다 유능한 사람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계약이 끝나면 나가게 되어있다. 그것은 예산을 절감해주는대신,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추구하는 발전과 상충하는 것이다. 그 불안정한 자리는 수준을 결코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 자리는 채워졌다가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것이므로 누가 어떤 역량을 선보일것인가보다는 어떻게든 그들의 사업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사람을 기대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그 자리는 무능력해도 좋으니 문제만 일으키지 말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대해 기대하는 직원은 단 한명도 없다. 그것을 명심해야만 계약직으로 무난하게 생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지금 처한 위기는 물론 내가 겪은 계약직의 문제와는 다르다. 나는 계약을 하고 들어갔지만 아트시네마는 민간에서 시작된 시네마테크 운동의 손수 피땀어린 결과물이다. 그들은 이곳을 찾는(을) 관객들을 위해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영환경을 마련하고자 정부로부터 약속받아 국고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랬던 상황은 정권교체와 함께 뿌리를 부정하는 제국주의의 위기를 맞았다. 영화인들은 영진위의 태도에 무척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문화부소속이기 전에 영화인이다. 그런 그들이 철저한 정권의 시녀처럼 굴고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부끄럽지만 영진위에 민원글을 올렸다. 예술영화전용관 공모전사업과 시네마테크 공모전 전환사업을 혼동해서 질문이 약간 모호해졌다. 그러나 담당자는 너무도 친절하게 내가 혼동한 것을 설명해주고는 각각의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답변의 최대기간인 정확히 7일이 지난 후였다. 시네마테크 공모전에 관해 시네마테크 지원사업담당자에게 답변을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데로 위원회는 1995년부터 시작된 ‘전국시네마테크연합’ 활동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시네마테크 활동의 질을 강화하고자 2002년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를 개관하여 안정적인 영화상영공간인 시네마테크전용관 마련하였고, 2005년 4월 현 원상?(구)허리우드 극장)로 이전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위원회는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 및 지원예산을 확보하고,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는 업무를 위탁받아 운영하여 시네마테크프로그램을 통해 교육적·문화적 목적의 영화상영이라는 시네마테크 본연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의하신 서울아트시네마 공모 관련 내용은 서울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운영, 지원신청 접수·심사에 의해 선정되는 예술영화전용관사업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며, 위원회에서 운영지원을 하고 있는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위탁자운영과 관련하여 2008년도 국정감사 시 위원회가 위탁하는 지원사업에 소수의 단체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지정위탁 하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남을 지적받아 이에 대한 개선점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단체를 대상으로 공개 공모 절차를 진행하여, 사업 신청의 기회를 제공하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사업 취지에 맞는 위탁단체를 선정하여 사업추진 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시네마테크전용관 고유의 사업 목적을 훼손하거나 지원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네마테크 사업 운영의 방식을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이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위원회는 시네마테크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의 지원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사업과 관련 된 문의 내용이 있으시면, 영상문화조성팀 최은실 (02-95807564)에게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이 답변을 듣고 한낱 관객임에도 실소를 지을수밖에 없었다. 영진위 스스로의 위치를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떄문이다. 시네마테크운동의 발전적 계승, 사업의 질 강화를 위해 자신들이 (마치) 개관하고 마련하여서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또 지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운영지원을 해왔다고 말하다가 그동안 서울아트시네마에 영진위가 위탁해온 사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나서는 결론적으로 사업취지에 맞는 위탁단체를 자신들이 선정하여 시네마테크를 안정적으로 지원하고자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위탁'이라는 말과 '지원'이라는 말을 급격도로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국민을 위한다는 정권의 말속에는 탈식민주의시대의 새로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식민주의가 약속해준 경제의 발전이라는 과거의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진위의 이러한 앞뒤가 안맞는 태도는 곧 정부의 입장의 대변이자 그들의 위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2008년 문광부 산하단체의 국감자료를 국회홈페이지에서 찾아보라. 한나라당 의원들이 특정 공격성 발언을 하는 의원들에게 질의를 몰아주어 당략적으로 심의했고 관계부처의 장들은 꾸뻑이며 검토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효율과 안정을 꾀한다는 목적은 다 그럴듯하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효율과 안정이라는 개념과 시네마테크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 개념과는 뿌리부터 다르다는 것에 있다. 그들이 쓰려는 역사와 우리가 쓰려는 역사는 이렇게 다르다. 지아장커 감독이 24시티를 만들 때 했던 인터뷰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는 중국역사에 대해 wating의 다큐가 아닌 making의 다큐를 만든다. 그는 집단(지배자)의 역사가 아닌 개인의 보편적인 역사를 기록하려 한다. 그것을 위해 그는 허구적인 요소들 개입시킨다. 그에게 진실과 거짓이란 리얼리티와 허구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진실이란 개인들의 역사이고 거짓은 다름아닌 집단 지배자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그는 420팩토리 공장에 얽힌 기억에 대해 침묵하거나 신음소리로 대신하는 노동자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공식적인 공장의 사업에 얽힌 역사적인 기억으로 시작하지만 아주 사적인 고백들을 늘어놓으며 눈물을 흘리는 여공들 향해 더욱 오래 카메라를 남겨두는 것이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보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 담배연기, 그 오래된 건물의 뿌연 흙먼지와 무너지던 순간의 가루의 잔상들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조안첸 자오타오 등의 배우들에게 연기를 시킨다. 진실을 위해 과거를 재연하는 것을 그는 인위적인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들을 보편적인 압축물로 설정한 것이다. 영화라는 것이 어쩌면 정확히 그런 속성을 가진 것일지 모르겠다. 내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네마로서의 영화를 처음 만난 기억은 위에 지루하게 언급했듯이 그런 기억들이다. 1950년대 말 공장의 기억에 대해 2008년에 누군가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아트시네마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적인 과거가 호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번 사건의 논제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핵심적인 논제위에 올라야할 소중한 우리의 역사들이다. 말해졌으면 좋겠다. 24시티에서 실제 노동자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터뷰보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치다가 웃어버리기도 하고 굳어져버려 정지된 사진처럼 기념된다. 공장이 폭파로 사라지기 전 손전등을 든 관리자가 마지막으로 허물어진 건물 내부를 비추며 클래식 선율이 울리는 장면이 있다. 그 때 외부에서 누군가 돌팔매를 던지고 노래가 멈춘다. 낭만이 멈춰지고 그 과거를 벗어나려는 눈물이 흐른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시네마테크에 얽힌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호출하는 일이 지금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