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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러프컷을 다시 읽다가 든 단상


김영진의 러프 컷: 시네마테크 생각 2006.12.08 김영진 편집위원

이제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에 따라 관객도 물론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시간을 벌어주는 현재로선 거의 유일한 공간이 시네마테크지만 그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은 너무 모자란다.

지난 일주일간 두 차례 지방의 시네마테크에 다녀왔다. 한 번은 부산 시네마테크의 요청으로, 박찬욱 감독이 추천한 루키노 비스콘티의 <센소>란 영화를 관객과 함께 보고 대화하는 자리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수요 시네클럽이란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그날 밤 자리는 무척 좋았다. 관객들은 집중력이 있었으며 박찬욱 감독의 달변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센소>를 다 같이 즐긴 포만감이 모든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귀족 출신 비스콘티 감독의 데카당스 미학이 막 만개하기 시작할 무렵인 1950년대 초반 작품 <센소>는 멜로드라마의 격정을 귀족 계급의 의상에 포개 표현한 미장센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숨 막히는 영화였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알리다 발리의 화려한 의상이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로, 박찬욱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여주인공이 걸치는 벨벳이 그녀의 얼굴표정만큼이나 중요한 영화였다. 그녀가 귀족 대저택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문을 여닫을 때마다 전 우주가 요동치는 듯한 벅찬 열정을 실어 보여주는 이런 작품이야말로 왜 스크린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지 실감하게 해줬다. 그날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영화청년의 시절로 돌아간 듯한 활기를 만끽했다.

부산 시네마테크는 갈 때마다 점점 분위기가 성숙돼가는 느낌을 받는다. 특이한 것은 그곳의 관객이 젊은 층 위주가 아닌 중년층 관객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부산지역에 꽤 많은 영화과 대학생들이 왜 그곳을 자주 찾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3,40대의 관객이 많은 것은 서울에서도 볼 수 없는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였다. 영화문화의 일상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부산 시네마테크는 부산영화제 인력이 상주하며 부산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에 반해 여타 지방의 시네마테크는 아직 미개지나 마찬가지다.

한 달여 전 시네마테크의 위기에 관한 공청회 자리에서 만난 대전 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는 대전지역의 씨네클럽 운동을 토대로 막 개관한 대전 아트시네마의 현실에 관해 우울하지만 결의에 찬 의지를 드러냈었다. 그는 대전지역의 시네마테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높일 목적으로 1회 둔지미영화제를 열 생각이라며 필자에게 초청강사로 와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며칠 전 마침내 열린 그 영화제에 참석한 필자는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관해 해설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날 자리에 모인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체로 씨네클럽의 회원이 다수인 듯 보였다. 집중력이 있었지만 아직 이곳에서 시네마테크의 열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강민구 대표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경제적으로는 적자지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며칠 전 봉준호 감독이 내려와 마틴 스콜세지의 <레이징 불>에 관해 관객과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그는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이 촬영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두 명의 직원들에게 교통비 지급을 하는 수준의 열악한 경영조건이지만 그는 관객이 더 많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날 대전에서 짧은 강의를 끝낸 후에 관객들과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대체로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질문들이었다. 현재 평론의 위상에 관한 얘기도 오갔는데, 아트시네마란 공간에서 듣기엔 좀 민망한 것으로 평론이 왜 대중의 취향과는 상반되느냐는 불만이 토로됐다. 오늘날 이런 얘기는 어디서나 곧잘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을 수 없게 쓰는 평론가들의 글쓰기 자질이나 별 것 아닌 알맹이를 잔뜩 힘이 들어간 문체로 가리려 드는, 통찰보다는 현학에 기대는 평론가들의 무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게 현재 대다수 평론가들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순전히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는 평론의 문제라면 또 달라진다. 이는 숱한 관객들이 대중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영화들에 대한 비난까지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를 평론이 지지하지 않고 대중이 재미없어하는 영화를 평론이 지지하느냐는 말은 박스오피스 성적이 영화의 질까지 판정한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 많은 사람이 즐긴 영화가 곧 좋은 영화라고 여기는 발상에는 관객의 취향에 복종하고 봉사하며 때로는 아부하는 영화의 오락성과 예술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폭력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요즘에는 어디서나 이런 식의 폭력적 이분법을 목격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이지만 예술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두 가지가 절충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오락은 박스오피스의 성공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즐긴 오락 이외의 것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평론가들의 말에 적개심을 품는다. 이 적개심의 뿌리에는 그들이 보지 않으려 드는 영화들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필름2.0 사이트의 관객평론 동영상을 봤더니 어떤 참가자는 평론이 길거리 100인에게 물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영화의 근거를 써야 하는 것이라는 기막힌 주장을 하고 있었다. 영화계에서 가장 통용되기 쉬운 거짓말은 좋은 영화가 관객을 불러 모은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영화는 그들의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하며 많은 마케팅 예산을 쓴 영화라는 쪽에 가깝다. 대중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편견이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아부하는 삼류 제작자의 주장일 뿐이다. 좋은 영화가 늘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영화가 늘 좋은 영화인 것도 아니다.

물론 예술적 야심이 있지만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많은 감독들이 있다. 봉준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관객을 같은 목적지에 태울 수 있는 버스가 어떤 것이지 고민하고 일단 관객을 태우면 자신의 취향대로 목적지를 어떻게 바꿀지 또 고민한다고 한다. 이 비유적인 말은 관객의 취향이 장르와 스타라는 영화산업의 기본 코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담 없이 루키노 비스콘티의 멜로드라마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서스펜스 스릴러를 보러 극장에 갔던 시대는 좋은 시대였다. 그 시대에 영화는 오락이자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 훨씬 컸다. 소수의 대작 위주로 재편된 오늘날의 극장환경에서 그 절충적 여지는 훨씬 줄어든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개봉한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극장>은 비평적 주목도에 비해 재앙에 가까운 흥행스코어를 기록했다. 첫 주말 이 영화는 전국 관객 1만 명을 조금 넘겼으며 이 영화가 상영된 수십 개의 스크린들은 텅텅 비었다. 개봉 다음 주에 사적으로 만난 전계수 감독은 영화의 그런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의 술자리가 길어지자 그가 조금씩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보편성을 강요하는 현실이 싫다, 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혐오하는 관객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힘들여 사운드작업을 했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 멀티플렉스 극장시설에 실망했다, 70여 개의 스크린을 연 것은 자신의 영화 성격에 비해 너무 큰 규모인 것 같다, 자그마한 규모로 개봉해 오래 관객을 기다릴 수는 없는지 답답하다, 내 영화가 그 많은 스크린에서 금방 사라질 것이 슬프다, 라는 것이 그가 이날 피력한 소회였다.

이제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에 따라 관객도 물론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흥행에 실패한 영화들은 죄인 취급을 받고 잔인하게 버려진다. 그 틈은 너무 짧다. 그 사이에 우리가 영화를 논할 대화의 기회도 사라진다. 우리는 새로 개봉되는 영화의 정보를 따라가기에도 바쁘다. 숨 가쁘고 경박한 이 영화관람 주기에서 우리가 좋은 영화를 바라보고 생각할 시간은 더욱 줄어든다. 관객들이 우리를 만족시킬 영화를 내놓고 선전해보라는 태도를 갖게 한 것은 영화계의 책임이다.

그 결과, 개봉되는 영화들의 대다수가 흥행에 실패하고 영화계는 딱 한 명의 승자만 허용하는 도박판과 비슷한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존하고 재상영하며 좋은 과거의 영화를 오늘에 되살려 관객과 만나려 하는 전국의 시네마테크 종사자들은 한 달 월급 3, 40만 원으로 버티며 너희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냐는 대접을 받고 있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 발표한 성명서는 영화계의 반향을 그다지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존망을 언급하는 만큼이나 좋은 영화에 대한 우리의 존중심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 모자란다. 그 시간을 벌어주는 현재로선 거의 유일한 공간이 시네마테크지만 그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도 너무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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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읽는 글. 이런 역행의 시대엔 거꾸로 순수할 정도로 치열했던 과거의 영화와 과거의 글들을 읽어야 버틸 수 있다. 월급3-40만원이라. 이런 비극을 왜 우리는 쉬쉬하며 살아야하지? 어짜피 봉사정신으로 시작한 일이니까? 억울하면 너네도 돈되는 일 좀 해 보던가? 뭐 좋다. 그러면 그러는 공무원은 얼마나 돈 되는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요즘 누구들처럼 딴지걸고 얻어터지면 값어치 올라가나?

극장에서 볼 영화가 지지리도 없다. 현재 개봉영화 극장에서 상영되는 창조적인 영화는 '24시티' 딱 한편이라고 생각한다. 겨우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와 낮술만 봤다. 그래도 독립영화는 기분은 잡치지 않는다. '벤자민 버튼..', '레볼루셔너리..' '다우트' 기타 등등 호평이 쏟아지는데 영화의 우아함이 어쩌고 하는데 솔직히 여기에 언급된 비스콘티 센소보다 더 우아한지? '다우트'같은 영화도 사실 고전에서 차용한 것 아닌가. 그것을 현대적 장치들을 차용하여 제대로 때깔까지 입히면 우리는 그 결과물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본삼은 것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현대적인 발견 혹은 창조물인 것처럼 사람들이 흥분할 때 나는 어느센가 좀 시니컬해져 있다. 발키리에 대해서도 당일에는 흥분해서 썼지만 사실 상업영화들은 자본의 요소들을 감안하고 볼 수 밖엔 없다. 요즘의 대중영화들을 보면 체에 흔들어내고 싶은 심정이다. 과연 무엇이 남는가. 돈 빼고 나면 말이다. 매끈한 영상과 사운드라는 개념자체를 상실해서 테크니컬한 것이 마치 매끈한 것처럼 되어버린 현실은, 우리의 시지각을 고전의 진정한 스타일리쉬함에서 멀어지도록 만든다.

후. 진짜 집에서 디비디 보기 싫은데 말이다. 유일하게 필름포럼에서 회고전을 한다. 물론 시네마테크 협의회에서 주최하는 것이다. 프레스톤 스터지스와 제리 루이스 영화를 보는데 이렇게 안 웃을 수 있는 내 굳어진 페이스가 스스로 놀랍다. 나는 오히려 낮술에서 한민관을 닮은 그 펜션 사장의 술주정 때문에 나사풀려 웃었다. 머리로는 웃긴데 가슴으로 웃지를 못한다. '설리반의 여행'에서 조엘 매크리와 베로니카 레이크가 마치 줄앤짐을 떠올리게 만드는 복장을 비슷하게 하고는(물론 더 거렁뱅이) 부랑자 열차에 천신만고 끝에 탈 때 이것을 뻔히 지켜보던 아저씨가 태연하게 'amatuer'하는데서 처음 웃었을 뿐이다. 영화 감독인 조엘 메크리가 가짜 부랑행세에서 진짜 부랑자가 되는 계기는 뜻하지 않은데서 시작된다. 부랑자들을 도우려고 길거리에 돈 뿌리다가 결국 꼬리잡힌 것이다. 쇠고랑 차고 살다가 디즈니 에니메이션을 통해 해학의 깨달음을 얻는 결말은 좀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감독이 선택한 것은, 부랑자들의 로드무비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미디다. 여기서 그의 하인이 영화초반 그에게 했던 인상적인 경고가 있는데 이 얘길 듣고 감독은 '가끔 저 친구는 무섭다'고 말한다. 누군가 옆에서 '저 친구는 책벌레죠'라며 거든다. 하인은 영화를 위해 부랑자 여행을 떠나려는 감독에게 '그런 영화는 계급화하길 즐겨하는 부자들이나 좋아할 것'이라며 실제 서민들은 영화에서 자신의 실생활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계급에 대한 문제들 건들이며 자본과 권력과 위탁한 미국사회의 실상을 유쾌한 터치로 묘사한다. 나는 스크로볼 코미디를 아직 잘 못본다. 영어가 딸리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해서 못 웃는 것인지 당시의 유행적인 기류에 전혀 발맞출수 없어서 못 웃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내가 여유없이 영화를 대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새학기가 시작해서인지 시네마테크가 뒤숭숭해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웃음도 사람도 뜸하다. 16미리인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화질도 안좋다. 그런데 이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뭔가 이런 불편한 느낌 그대로 뭔가 기억되는 것이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영화는 그것의 장르적 형식을 떠나 시대를 망각시키려 하지 않는다. 상황을 잊게 만드는 영화는 나에게 나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은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심리의 문제가 큰 것이다. 현재의 안위를 위해 지금을 무마하며 이기적으로 잘 살아야만 하는 것에 치중한 모습들은 추한 뒷모습을 끝내 보여주고야 만다. 시네마테크는 이미 수년전부터 성명서를 발표하며 시네마테크의 존립위기를 표명해 왔고 도움을 요청해왔는데 특정 영화인들을 제외하고는 너무 조용하다. 친구들이라는 감독들과 배우들도 제 목소리를 내주진 못한다. 솔직히 박찬욱 봉준호 같은 감독이 한번 터뜨려주면 대박나는거 아닌가. 이명세감독은 강한섭평론가와 오랜 친분도 있지 않은가. 엔젤들은 무셰트 기증해주고 다시 상업영화현장으로 돌아갔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학교 재단이 상업적으로 뒤바뀌게 생겼는데 그 자양분에 대해 한 목소리를 좀 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시네마테크에 와서나 흥분할 게 아니라 말이다. 그들은 영화적 공인이질 않은가. 그들은 한국영화 국가대표가 아닌가. 관객들은 물론 각자의 공간에서 이렇게 나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우리도 때가 되면 뭉쳐야 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사랑한 자 모두 유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