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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외부 기사

[오마이뉴스] 옥상의 낙원'마저 빼앗아야겠습니까

*이 글의 저작권은 오마이뉴스에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 공모 전환, 오늘도 내일도 안 됩니다
   허진무 (riverrun88)
  
서울아트시네마의 풍경. 종로 3가에 있는 낙원상가 4층으로 가면 탁 트인 옥상이 나온다. 거기에 작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 허진무

'서울아트시네마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얼이 빠졌다. 그곳이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니까 심장이 가슴에서 튀어나와 땅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망연했다.

 

얘기인즉슨, 영화진흥위원회가 시네마테크 지원 사업 방식을 공모제로 전환한다고 일방 통보했다는 거였다. 날벼락 통보였고 대화는 없었다. 영진위 시네마테크 지원금이 예산의 30%를 점하는 서울아트시네마다. 지원금은 임대료 등 필수적인 부분에 쓴다. 때문에 만약 공모제에서 탈락하게 되면 당장 극장의 목숨이 위협을 당한다. 서울아트시네마는 민간 주도로 이어온 극장이다. 이제 와 영진위는 고작 30%의 예산지원이란 명목으로 서울아트시네마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반발의 아우성이 메아리치자 영진위는 25일 "올해는 공모제 전환을 철회하고 내년으로 연기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떨어지는 칼날을 겨우 피하긴 했지만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영진위의 독립영화 지원비 폐지 사건과 맞물려 영화계 또한 자본의 불도저로 밀어버리려는 심산이 아닌지 크게 걱정이 된다. 더욱이 하필 서울아트시네마라니! 절대로 안 된다.

 

서울아트시네마를 빼고 어찌 종로를 논할까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중, 역시 '친구들'의 하나인 봉준호 감독의 헌사.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낙원이다.
ⓒ 허진무

세상에는 많은 극장이 있지만 서울아트시네마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극장이다. 종로에 관한 거의 모든 추억은 서울아트시네마로 통한다. 왜냐하면 종로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서울아트시네마도 가기 때문이다.

 

종로의 굽이지고 낡은 골목들, 젖은 아스팔트와 억척스런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는 정겹다. 종로 3가에 들어서면, 벌써부터 멀리 낙원상가의 큼직한 건물이 보인다. 종로 거리를 거닐고서 낙원상가를 비켜갈 수는 없다.

 

낙원상가 밑에는 1500원에 우거지 국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 돈은 궁한데 배는 고프고, 영화도 보고 싶을 때 나는 영화값을 남기기 위해 여기서 밥을 먹었다.

 

허름하고 비좁은 곳에서 복닥이며 먹는 국밥 맛은 특별했다. 뜨끈한 국물로 배를 채우고 낙원상가 4층 옥상의 낙원으로 어슬렁 가는 것이다. 옥상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나는 낙원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진짜 낙원이다.

 

괴상하게도 상가 옥상에 있다는 시네마테크를 처음 찾은 계기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고전 영화와 예술·실험 영화들을 틀어준다는 극장이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거기에는 공룡 영화들에 질려버린 감성도 영향을 끼쳤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첫 번째 영화는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모퉁이 가게>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감독에다 듣도 보도 못한 1940년산 영화다. 그러나 나는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혼이 빠졌다. 영화의 나이만 따지자면 영락없는 노인 영화라고 할 테지만 60년이 넘는 나이 차가 있는 청년의 눈을 빼앗았다. 벌써 고전이란 딱지가 붙여진 흑백 필름이 여전히 가슴을 울리고 눈물을 닦아주니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도 못했다.

 

자본에 패한 영화들에 위안받는 곳

 

  
서울아트시네마는 좋은 영화라면 어떤 영화든 가리지 앟는다. 이제 멀티플렉스에서는 틀어주지 않는 필름이 시네마테크에서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
ⓒ 허진무

그것은 죽비였다. 순간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대형 극장만을 드나들며 영화적 지배를 당했다는 걸 알았다. 조금 다른 영화를 보겠다는 상상력을 상실했었다. 대한민국의 영화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삼총사가 지배하고 멀티플렉스는 거대자본 영화가 지배하고 있다.

 

돈벌이가 되는 이른바 공룡 영화들이 상영관을 점령하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소수자의 영화는 금방 간판을 내리고 변방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어느덧 영화가 산업의 주판으로 계산되기 시작한 이래 일어나는 비극이다. 그런 자본의 전쟁에서 패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변방의 주막이 바로 시네마테크다.

 

전국을 통틀어 딱 여덟 개 있는 시네마테크는 비영리 영화관이다. 돈벌이를 위한 극장이 아니다. 당최 돈하고는 서먹한 영화만 틀어주니 영화로 장사하려다가는 진작 망했을 테다. 시네마테크는 오롯이 영화와 관객을 위하여 있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다른 무엇보다 분위기를 사랑한다. 정말이지 영화가 좋아 죽겠다는 이들이 내쉬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가득이다. 재미난 영화를 좋아하는 데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하이힐을 신은 여대생부터 두둑한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영화가 좋아 시네마테크를 찾는다.

 

스크린을 바라볼 때면 연인을 바라보듯 그윽하고 진지하다. 집에서 서울아트시네마까지는 지하철과 버스로 두 시간이 걸리지만 그곳의 공기가 그리워 어쩔 도리가 없다. 최근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는 중에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을 보러 갔었다. 퀴어 멜로와 신화를 끌어들여 실험하는 태국산 영화지만 빈틈없이 자리가 꽉 들어찼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혀를 내두르며 혼자 중얼거리는 거였다.

 

"이야, 영화 좋아하는 사람 진짜 많구나."

 

당신도, 시네마테크의 친구가 되어주세요

 

  
서울아트시네마 벽 한켠에 걸린 '친구들'의 사진. 임권택, 봉준호, 박찬욱, 배창호, 홍상수 같은 감독들부터 안성기, 권해효, 하승우, 류승범 같은 배우들까지 여러 사진이 붙어 있다.
ⓒ 허진무

시네마테크의 정신을 한눈에 보여주는 특별한 풍경이 있다.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극장도 불을 켜지 않는다. 화면에는 감독부터 말단 스태프까지 이름이 꼬박 실린 엔딩 크레딧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극장에는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끔 짤막한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다.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와 존중이다. 처음에 이 낯선 습성과 마주했을 때 감동으로 몸이 저릿했다. 상업적 수단으로, 혹은 즉각적인 오락으로만 여기는 요즘 세태에서 드문 풍경이다.

 

류승완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요즘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연정과 예의를 잃어가고 있다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영화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일은 이제 와 거의 국가적 의식이 된 시대라 그럴 테다. 하지만 아직도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도 영화를 친구로서 사귀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친구로서 맞이하고자 하는 영화관이 있다. 류승완부터 안성기까지 여러 감독들과 배우들도 다투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 되는 까닭이다.

 

새로운 영화와 만나는 순간은 새로운 친구와 만나듯 언제나 수줍다. 좋은 영화라면 옛날의 영화든 오늘날의 영화든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틀어주는 극장이다. 나는 시네마테크에서 많은 영화들과 친구가 되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소수자의 극장이지만 동시에 다양성의 극장이다.

 

자본의 무차별 진압으로 대중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난 영화들의 마지막 거점이다. 예비 감독과 예비 배우가 학습하는 교육의 현장이며 영화의 역사가 살아서 관객과 만나는 공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낙원이다. 씨앗은 물과 볕을 조심하며 오래 돌봐야 비로소 싹이 트고 예쁜 꽃도 피는 법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영화를 사고파는 데 열중한다면 결국 숲 전체가 몽땅 시들고 말 테다. '제2의 워낭소리'도 씨가 마른다. 내일은 다들 서울아트시네마로 가서 좋은 영화도 보고 낙원상가 아래 천 원짜리 떡볶이도 먹어 보길 권한다.

 

이다음부터는 종로의 모든 거리가 결국 서울아트시네마로 통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서울아트시네마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가히 시네마테크의 멸망은 사랑의 멸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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