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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5월 9일 아라비아의 로렌스 상영 후 강연


5월 9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시 30분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한 후에 김영진 평론가의 강의가 있었다. 영화 상영 전에는 영화를 보러 온 이명세 감독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간략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명세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다큐멘터리에서 스필버그가 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필버그는 로렌스가 성냥불을 끄고 바로 어두운 새벽에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것, 그 장면을 가리켜 '이것이 영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영화에서밖에는 볼 수 없는 장면, 영화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이명세 감독은 그것을 스크린으로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이명세 감독을 소개하기 전에 시설 때문에 아쉽게도 70mm로 상영할 수는 없지만, 35mm로도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210분으로 인터미션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강연이 시작되었다. 김영진 평론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진정 스크린으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운을 뗀다. 그는 대한극장이 헐리기 전,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상영되었던 이 영화를 봤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때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70mm로 상영했다. 후배들이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해서 자신이 가겠다고 이야기했는데, 막상 혼자가기 싫어서 밥 사주겠다며 후배들 두 명을 끌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온 후배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 영화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김영진 평론가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진 평론가는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8시간짜리 필리핀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를 한다. 프로그래머가 부탁해서 GV를 맡았는데, 너무 피곤해서 한 시간 보다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러닝타임이 다섯 시간쯤 남아있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아주 편안히 영화를 봤다고. 그 두어시간 동안 스토리가 별로 진행된 게 없어서 영화 내용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대여섯시간 지나니까 사람들이 피곤해서 다 나가고 스물다섯명쯤 남아서 끝까지 영화를 보는데, 남아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별다른 액션도 없는 영화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의 깊이가 엄청나더라는 것. 이 영화가 자신의 대작에 대한 통념을 바꿨다고 김영진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지금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스펙터클 같은 건 만들어질 수 없는 시대다. 오마 샤리프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만약 당신이 스타도 없고, 여자도 없고, 여자가 없으니까 당연히 로맨스도 없고, 액션도 없는 영화를 만드는데 사막에 가서 찍어야 되고 러닝타임이 네 시간짜리다. 이런 영화를 누가 만들고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그런데 그걸 해낸 게 데이비드 린이다. 데이비드 린은 완벽주의자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수많은 야사를 남겼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낙타들조차 일일이 캐스팅했다고 한다. 당시 아우다 아부 타이 족장 역으로 출연한 안소니 퀸은 주급으로 10만 달러를 받았고, 데이비드 린은 우아한 영국 신사여서 촬영하다 문제가 생기면 컷을 외치는 대신 일어서서 스탭들에게 미안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걸로 대신했다고 한다. 어느 날 촬영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제작자 샘 스피겔과 안소니 퀸 부부, 데이비드 린 등이 저녁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데이비드 린은 그 자리에서 샘 스피겔에게 후반부의 각본에 문제가 있어서 수정을 해야 하는데, 각본을 쓴 로버트 볼트에게 물어보니 고치는데 10주가 걸린다고, 그 동안 촬영을 중단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안소니 퀸은 10주 동안 놀면서 돈 받을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좋아했지만 데이비드 린의 말을 들은 샘 스피겔은 스프 접시에 얼굴을 박고 기절해버렸다. 데이비드 린은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안소니 퀸의 부인에게 샘 스피겔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데이비드 린은 이런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어느 날 샘 스피겔이 촬영 중인 데이비드 린을 다시 찾아갔는데 데이비드 린이 사막 한 가운데서 혼자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촬영도 엉망이고, 연기도 엉망이고, 연출은 더더욱 엉망이라서 이 영화는 실패라면서(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작이 나왔다. 러닝타임이 너무 긴 탓에 오리지널로 할 것인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개봉할 것인지 설왕설래가 오간 끝에 10분을 삭제하고 전세계적으로 개봉을 할 수 있었다.

T.E. 로렌스의 자서전은 [지혜의 일곱 기둥]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발간이 되었다고 한다. 자서전을 읽어보면 T.E. 로렌스는 돈키호테적인 인간이며 엄청난 자뻑의 소유자인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굉장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데이비드 린과 로버트 볼트는 그걸 참조만 하고 자신들 나름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만약 요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만든다면 이 영화는 아랍 군대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부분에서 끝나지 않을까? 이 영화는 로렌스가 배제되는 정치적인 정황이나 실패한 영웅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T.E. 로렌스를 비판하면서 실은 그는 제국주의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 적 있는데, 생각해 보면 스펙터클한 영화 중에서 이렇게 복잡한 영화가 있었나 의문스럽다고 김영진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주인공은 시련을 겪으면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분열되고 망가져간다.
당시의 데이비드 린은 전세계적인 흥행 감독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반면 평론가들의 지지를 차차 잃어가고 있었다. 데이비드 린은 16편의 영화를 남긴 과작의 감독인데 그가 영화를 많이 만들지 못한 데에는 시대의 변화 탓도 있었다(이 부분은 제대로 메모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은 국제적인 합작 영화를 계속 성공시켰다. [라이언의 딸] 같은 작품은 심지어 1년 동안 극장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그가 영국에서 만든 [밀회] 같은 소품에 가까운 영화들을 더 좋아했다. 어느 자리에선가 데이비드 린은 유명한 평론가 폴린 카엘을 만났는데, 혀가 매서웠던 폴린 카엘은 데이비드 린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마침내 화가 난 데이비드 린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제가 40년대풍의 레터박스 흑백영화만 찍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폴린 카엘은 컬러까지는 봐드리겠다고 대꾸한다. 이에 데이비드 린은 자신에게 반성할 점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이후 14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김영진 평론가는 폴린 카엘이 훌륭한 평론가이기는 하지만 그런 비난은 부당한 것 아니었느냐고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린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잡역부로 시작해서 10년 동안 스튜디오에서 편집하는 일을 했다. 한때는 그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모든 영화를 데이비드 린이 편집하던 때도 있었으며 산책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편집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경력을 가진 데이비드 린은 고전적 편집 스타일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위대한 유산]의 첫번째 시퀀스 같은 경우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완벽하게 함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정말 들었다놨다 했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은 무서운 나무를 보고 움츠러들고, 거기서 탈옥수를 만나는데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놀라는 것을 객석에서 본 데이비드 린은 됐다, 이 영화는 성공이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위대한 점은 대사가 없는 씬에 있는 것 같다고 김영진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로렌스가 사막으로 나가서 혼자 생각하고 그걸 두 아랍 소년이 쳐다보는 장면, 그 장면을 보면 꼭 사막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로렌스는 왜 사막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깨끗하니까, 라고 대답하는데 그것은 다른 세계에 있지만 자신이 지금 있는 이 세계에 매혹된 나머지 이 세계에 속하고 싶은 로렌스의 내면과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 매혹을 사막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상 가장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가 있는데, 무명의 오마 샤리프를 스타로 만든 장면이다. 주변에서는 자르자고, 디졸브로 하자고 했지만 데이비드 린은 완고하게 고집을 지켰다. 이 장면을 위해 촬영감독 프레디 영은 750mm 장초점 렌즈를 제작했다. 그 장면은 바로, 영화 초반부에서 사막에 있는 오마 샤리프가 하나의 점처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는 흐릿한 점처럼 들어와서 로렌스와 마음을 주고받는 고귀한 야만인이 된다.
1950년대, 60년대는 다국적 스펙터클의 전성시대였고, 데이비드 린의 성공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실패의 사례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클레오파트라]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이 들어갔고, 실패함으로써 영화사를 휘청거리게 한 작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보면, 이 영화는 실패작은 아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들어오는 장면 같은 경우, 지금에야 CG로 모든 것을 처리했겠지만 그때는 그 로마 거리를 실제로 지었다. 그 수많은 엑스트라들도 실제로 동원했고. 그 장면을 찍는 순간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진짜 클레오파트라가 되지 않았을까.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는 스페인에서 찍었는데, 도중에 러시아 혁명과 관련된 몹씬이 하나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엑스트라들 중에는 스페인 내전 참전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그 장면을 찍으면서 몹시 울었고, 자신들이 체험한 혁명적인 상황에서의 고양된 분위기를 그대로 그 장면에 전달했다. 실제 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오해한 경찰이 출동했었고, 경찰에 포위된 상태에서 밤새도록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닥터 지바고]를 보면 그런 아우라가 그대로 스크린에 전염된 느낌을 주는데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마찬가지다. 아우다 아부 타이 족장의 마을이 펼쳐지는 장면도 요새는 다 CG로 그려내지 않겠는가. 아카바 점령 시퀀스도, 변변한 전투 장면이 없다. 그냥 아랍 군대가 말을 타고 한번 쭉 밀고 들어가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변변한 전투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고 스펙터클하다. 대작으로 보기에 불만이 없는 것이다. 이런 아날로그적인 질감, 스크린에 담겨있는 정서는 오늘날 재현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고 김영진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린은 매체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감독이었다(무성영화를 찍던 감독들의 활동기를 김영진 평론가는 마지막 거장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 같다). 가령 존 포드 같은 감독은 의외로 와이드스크린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데이비드 린은 스탠더드에서 와이드스크린으로 넘어오면서 안소니 만과 더불어 랜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막 가서 찍은 모 영화(아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그 영화,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생각하고 갔겠지만)가 있는데 보면 사막에 왜 갔느냐는 생각이 든다고 김영진 평론가는 말한다. 실제로 사막에서 영화를 찍기란 어렵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 그 사막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만, 실제 사막은 거대한 모래사장이다. 아무리 구도를 잡아도 그림이 안 나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등장인물의 얼굴에 집중하게 되는데 와이드스크린은 인물을 센터로 놓는 데 적합하지 않다.

데이비드 린은 자기 연출이 형편없다고 울었지만 장교클럽 시퀀스는 그의 연출력을 잘 보여준다. 실제 그 안에 담겨 있는 얘기는 사소하고 내용도 별 게 없지만 데이비드 린 감독은 그 몇 분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복잡한 감정과 로렌스가 처한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데이비드 린은 터키 장교에게 겁탈당하는(김영진 평론가는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한다) 장면 같은 것을 대단히 미묘하게 표현하는데,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대한 김영진 평론가의 결론은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굉장히 신중하고 겸손하게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아우다 아부 타이 족장 조차 나름대로의 지혜를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요새 영화들을 보면 어떤 영화 제목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을 함부로 정의하는 영화들이 많고, 최근의 인터넷 문화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판관인 것처럼 남들을 단죄(그러다 작년에 최모 배우가 죽지 않았느냐고 김영진 평론가는 이야기한다)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비판하고 있다. 김영진 평론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한 인간의 여백과 매력, 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고 그것은 한 인간의 삶에서 몇 개의 레이어를 추려내어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한다. 여전히 진행중인 에픽이며, 이 영화에서 소개된 것은 각각 인간들의 일면일 뿐이다. 이어서 그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를 관객들에게 추천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