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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고다르와 시네마테크

* 3/14에 있었던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시네마테크 연속포럼1- 고다르와 시네마테크>의 후기입니다.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은 고다르가 스스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춰보고 있다. 그는 자신을 비춰보고 있는 그를 스크린에 재차 투영하고 있다. 그의 어린시절 사진이 보인다. 그는 죽음이전에 미리 상복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는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애도로 가득하다. 상영되지 못한 영화들, 역사와 함께 만들어질 수 없었던 영화들에 대한 애도는 동시에 미래에 만들어질 영화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을 결핍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고다르의 아뜰리에는 하나의 극장이고 박물관이며 그 속의 고다르는 이야기의 화자이자 감독이자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몸과 자신의 세계를 박물관 속에 전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존재자체가 하나의 영화의 역사와도 같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적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한국 영화계의 굴곡들을 통과해 지금껏 대중과 영화적으로 소통하려는 최전선의 자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책과 글을 통해 그들을 만나고 또 관객과의 만남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영화를 이야기 속으로만 국한하여 만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존재자체로 영화를 둘러싼 환경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서 본다고 여기는 영화 한 편, 그리고 우리. 그 사이엔 과연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아무런 것(장애물과 그 장애물위에 건넌다리를 설치한 존재들)도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는 영화란 것에서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염두하지 않은 발견은 어떤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좋은 영화를 듬뿍 취하고 나서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영화를 뮈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정성일 평론가는 다수의 글에서 영화를 만난 방식과 그 연대기적 순서가 무척 중요하다는 언급을 했다. 영화가 결과론적인 사건이 아님을, 상영과 관람속에서 새로운 시간성을 부여받는 움직이는 예술임을, 그리고 그 선택의 방식에서 영화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들을 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시작에서부터 수혜를 입고 살아간다.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식에 대해 사회는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이 세상에 산업과 자본의 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혈연공동체일지 모르겠다. 비록 영화와 나는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그보다 더 끈끈한 무형물을 투척했고 그도 반응했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말한다. 내가 영화에서 영혼의 울림을 발견한 날은 2008년 이맘때의 고다르전이었다. 자화상, 사랑의 찬가, 아워뮤직을 보던 그 주말의 밤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어렵고 난해했다. 그런데 거꾸로 영화를 보는 눈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구체적인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긴 어렵다. 우리가 함께 보지 않고서는 말이다. 나는 그의 근래의 작들에 그가 자신의 영혼의 눈을 투영하고 있다고 느꼈다. 카메라 자체에 무언가 강력한 무형물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자화상에서의 고다르는 꼬장꼬장한 노인의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의 삶은 여전히 엉뚱한 유쾌함들을 잃지 않고 있다. 그만의 몽타주식 이해구조는 우리를 흥미롭게 이끌어간다. 액션과 리액션을 반복하는 소리들, 그만의 방식으로 병치되는 영상들의 독특한 정서들.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는듯한 히치콕식 벨소리와 새소리들. 영화와 역사라는 대과제를 앞에 두고 멜랑꼴리하다가도 털모자를 쓰고 잠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준다던가 늘씬한 하녀가 중요한 이야기를 중얼대는 순간 닥쳐-라고 호통치다가 갑자기 우는 아이에게 상어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하하하 웃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눈 먼 상태와 침묵이다. 눈 먼상태의 편집자, 그리고 중요한 순간 우리를 방해하는 소리들 이후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들. 그는 들려주고 말을 건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눈을 감고 하는 사색을 권한다. 고다르는 책 속의 인용구를 나직이 읊으며 사색에 잠긴 산책을 한다. 그는 박물관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또 스스로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의 방에서 돌아가는 비디오필름안의 영화들이다. 사실은 그것이 죽은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인데 거꾸로 그는 그것들이 살아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죽어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는 아직 지나가지조차 않았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역사속에서 영화가 소외받아온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가 지키지 못했던 영화예술의 예외성과 문화적 규칙에 대해 언급한다.

얼마전 스폰지에서 2년여간의 긴 투쟁끝에 '숏버스'를 개봉시키는데 성공했다. 씨네21에서 그 수훈인 변호사를 취재한 글을 보았다. 존 카메론 미첼감독도 한국의 개봉날짜에 맞추어 편지를 보내왔다. 스폰지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감동적이다. 사장될 수 있었던, 혹은 사장되었던 것을 살려내는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서부를 그런 식으로 살려냈고 멜빌이 레지스탕스들을 그런 식으로 살려내어 제대로 묻히지 못한 떠도는 영혼들을 장사치뤄주었다. 우리는 감동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살려낼 수 있었던 과정, 기꺼이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에 대해 그다지 감동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네마테크에서 레오네를 만난 사람들이었다면, 그의 영화를 떠올릴 때 그 극장의 거대한 환영이 솟아날 것임은 분명하다. 신화처럼 자리잡아 있던 수많은 짝퉁의 형식이나 서브텍스트(비디오,DVD)로 존재했던 것들을 원형그대로 복원해낸, 그들을 감옥에서부터 살려낸 공간이 시네마테크이다. 왜 그런 구원행위에 대한 감탄과 감사는 단발적으로 그치고 마는 것일까? 왜 그것에 적절한 보상행위는 어디서도 이루어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멜빌과 레오네의 열혈팬들, 온갖 어둠의 경로를 거쳐가는 수많은 B무비, 좀비영화들에 대한 예찬은 시대를 막론하고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들의 영화적 방식에 찬성한다면 우리는 시네마테크의 방식(규칙)에도 동참해야 함은 당연지사가 아닐까.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신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시네마테크는 신화를 쓰는 곳이 아닌 그것을 파괴하는 곳이 될 것이다. 누벨바그리언들이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을 만난 것은 생경한 것을 만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경로와 형태로 그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요즘의 시대에 시네마테크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전들을 만나온 방식을 수정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30년대를 4-50년대를, 그리고 6-70년대를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그 극장이 되는 것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체험보다 유용하다. 현대적 공간을 인지시킨채 박제되어있는 미술품을 보는 것이 아닌, 그 당시의 작업현장을 그대로 재연해내는 것이다. 영화란 시간예술이자, 그 시간의 개념을 지우는 예술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네마테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위대한 영화가 없었다면 시네마테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네마테크가 없었다면 위대한 영화는 보존될 수 없었다. 앙리 랑글루아는 상영이 곧 보존이라고 말했다. 환영성으로만 존재하는 영화를 휘발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상영하고 말해지고 씌어지는 것이다.

존재할 수 있었던, 만날 수 있었던 건 희망이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쥘이 열차를 타고 서부로 도착할 때의 그 시퀀스를 기억하는가. 그 아무것도 모른채 들뜬 장엄한 클래식의 희망찬 기운들을 말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러나 뒤이어 우리는 그녀가 서부의 거칠고 무정한  사내들의 세계에 발디디게 되는 것을 본다. 음악은 금새 귀를 쨀듯이 우리를 자극시킨다. 백치의 상태로 도착한 서부는 생존과 직접적으로 맞물려있는 그런 모래바람의 공간이었다. 옛날 옛적에 서부가 있었다. 그 옛날에 신화처럼 영화가 있었다. 우리는 친구들 영화제에서 그 전설적인 영화 탐욕을 엄청난 편집본으로 경험했다. 그 상태는 옛날 옛적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는 어렴풋한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이 영화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에피소드에 가까워 보였다. 그것이 완전한 복원상태이든, 비가 내리는 필름이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세월을 통과하여 무언가 손상을 입은 영화들의 몽타주를 만나고 있다. 고다르는 시네마테크에서 손실의 영화들을 만났다. 그는 위대한 영화를 만든 무르나우와 장비고를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누벨바그리언들은 그런 손실들과 싸워가며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조구치의 영화를 자막도 없이 보며 화면의 움직임에 대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우리들의 시네마테크는 고다르식의 몽타주 박물관은 아닐지 모른다. 랑글루아가 운영했던 프로그램의 방식(영화사적 시대구분을 넘나드는)보다는 국가(지역)과 작가 위주의 프로그램이다. 각국의 언어들이 많은 이들의 수작업을 통해 번역되어 보여지고, 영화에 대한 무료강좌가 진행된다. 영화선진국에 못지 않은 엄청난 프로그램들이 기획되고 연 400편의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은 조건에서 탄생한 영화들을 꽤 좋은 조건으로 만나고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6000원이란 영화가격에 나는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자본시장에서 영화는 예술품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손 때가 묻고 유효시간이 지난 것은 가격이 내려간다.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에서 영화가 예술도 기술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회화도 아니고 시네마토그라프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환영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의 시한을 다할 운명을 가진 절망속의 시도이다. 마을에서 쫓겨난 꽃 파는 행상이다. 눈먼 장님이다. 그런 대우를 견딜 운명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나서, 그런 죽음으로 이르는 운명을 가진 영화만이, 그런 치명성이 바로 영화였다고 말한다.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를 그렇게 바치고 있다.

매일 영화를 보면서 감사하고 그 영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다르에 따르자면 누군가는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그런 방식으로 전수되었기 때문에 지금껏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이런 영화가 있었다더라고 추측으로만 영화를 만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것을 복원해낸 손은 영화를 찍은 감독의 눈과 어쩌면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손을 눈으로 보고 있다. 손의 물리적 존재감은 눈을 통한 인지로 가능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전후의 '나'는 다른 '나'이다. 전자는 정신의 영역이고 후자는 물리의 영역이다. 이 두 명제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될 수 없다. 존재하는 물리성을 인지하는 것은 또다른 물리성으로만 가능하다. 영화는 그렇게 구원되어져 왔다. 전 세계 시네마테크 관계자들의 수혜행위로 말이다.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된 영화들은 새롭게 씌여져야만 할 것이다. 안방에서 만난 전설의 영화들이 이곳에서 필름으로 상영될 때 우리는 전율을 느꼈다. 고다르는 이미 오래전부터 필름으로 경험한 영화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비디오물을 조합하는 것이다. 그는 필름으로 고전을 경험한 세대이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TV와 비디오를 통해 고전을 접한 세대이다. 그런 우리가 고다르의 비디오물을 본다. 그것을 필름으로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조명하는 것은 고다르적 사고를 다 따라갈 수 없다는 결핌감을 준다. 고다르가 극장에서 학교로 정치적 현장으로 그리고 자신의 안방으로 온 경로를 본다면 우리는 정 반대이다. 안방에서 시작하여 학교를 가고 극장을 간다. 브라운관의 세대, 컴퓨터의 세대인 우리가 영화의 스승 고다르로부터 내려온 영화적 정신을 이어가는 길은, 지금 다시 시네마테크를 향하는 길이다. 대사관의 문화원과 복제 비디오물에 의존해서 씌여질 수 밖에 없었던 시네필의 역사는 이렇게 시네마테크의 순수 민간운동으로 자국의 역사로 씌여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영화선진국은 우리들로서만, 그렇게만 가능하다.

자국의 영화산업에 대한 문제의식은 시네마테크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제 이 영화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10년여간 이끌어온 이들의 업적에 감사를 표하며 그 사명감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얻어간 것 만큼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 영화가 바른 존재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속의 중요한 윤리적인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