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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극장, 씨네큐브, 그리고 시네마테크

언젠가 소쿠로프의 영화를 보면서 옆 자리의 애인 몰래 숨죽여 눈물을 흘리던 때가 있었다. 막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때 극장에서 보았던 그의 영화들에 너무 빠져버려 순간순간 눈물을 도저히 참아낼 방법을 몰랐다.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소쿠로프의 영화들을 시네마테크에서 보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냈던 것은 정확히 세 번이었다. 하나는 <러시아 방주>,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첫 장면은 서로를 강하게 보듬어 안는 아버지와 아들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얼핏보면 아픈 아들을 끌어안는, 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묘한 감정들을 나열한 듯 읽혀지는 이 장면은, 영화가 중반을 지날 때즈음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크린 속의 두 인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살짝 끌어안는 그 장면에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어떤 무언가가 가슴 속에 치밀어 올랐던 순간. 그때 반사적으로 생각했던 단어는 '상처'였다. 지금은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두 인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너무 힘이 들었다. 서로를 보듬는 손길, 그 손길 하나하나에 아픔이 서려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이후의 일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아버지와 아들>은 그 단 한 순간만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코끝이 시렸다.

언젠가부터 극장에 가는 간격이 뜸해지거나 엄청 바쁜 일이 생겨 한 달 동안 시네마테크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생기면 이유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뻔질나게 극장을 들락거리고 기웃거리던 때 막 생긴 그 감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네마테크를 향한 죄책감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지만, 극장을 찾지 못하거나 다른 일을 우선으로 두어야 할 때 나에겐 여전히 그것이 '길티'로 작용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그걸 '죄책감'이라는 단어로 치부했다. 내가 유일하고 홀가분하게 극장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긴 여행을 떠나는 시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별로 쉽지는 않았다. 여행을 떠나있는 동안 시네마테크를 생각하고, 미친듯이 그 지역 주변의 극장을 찾아다니며 기어코 무언가를 보고나서야 성질을 죽이곤 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런 것을 느끼는 자체를 소중하고 우월한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냥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더라. 덕분에 작은 모니터로 영화들을 찾아보는 것이 조금은 불편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주, 상영관이 별로 남지 않은 <차우>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신림역 앞에 있는 '롯데시네마 신림'지점을 찾았을 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곳은 지금의 강북권이나 강남역, 코엑스를 포함한 강남권보다는 조금 극장소식이 늦은 지역이기 때문에 메가박스 코엑스와 같이 다양한 상업영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단지 <차우>를 이용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차우>는 재미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정작 <차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불특정다수의 관객들이 이용하고 있는 바로 '그' 극장 자체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 조조를 보기 위해, 조금이라도 돈을 더 아끼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 청소년들, 그들에게 그 극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소비적. 소비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그 극장이 없어진다면 다른 곳을 찾아, 그것도 아니면 그냥 집안에서 텔레비젼을 통해 영화를 볼 것 같았다. 만일 그 공간의 그 극장이 없어진다면, 그들은 별로 동요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때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은 아주 크나 큰 아집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극장의 관객은 유동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모르게 침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차우>를 보고 온 그 날은 하루종일 우울했다.

그리고 얼마 후, 씨네큐브의 운영이 중단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네마테크는 크게 위기를 느꼈던 곳이지만 씨네큐브는 조금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상류층 엘리트들의 소유가 되어버린 듯한 극장의 주변 건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상영되는 극장은 예외였다. 광화문 벨트를 만든 장본인은 씨네큐브였기 때문에, 나는 늘 그곳을 통해 미로스페이스로 걸어나갔고 그곳을 통해 교보문고로 사라졌다. 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어떤 자신감, 그런 이유없는 자신감이 씨네큐브 앞 조형물을 지날 때마다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극장이 없어진단다. 손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무언가 내가 할 일따위는 없었다. 운영을 그냥 그렇게 정해버렸으니 관객은 어쩔 수 없었다. 참 답답한 것이더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오늘 우연히 들른 씨네큐브 홈페이지에 쓰여있는 글들도 그런 느낌이었다. 건조함, 건조한 느낌. 더이상 그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런데 씨네큐브와 반사적으로 연상된 극장은 시네마테크였다. 시네마테크의 위기는 늘 있었지만, 지난 2월의 타격은 예상보다 지나치게 크게 다가왔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어야 할 공간을 빼앗긴다는 자체가 목을 죄어왔다. 의자가 불편해도, 극장이 춥고 좁아도, 그래도 그곳은 견딜 수 있었다. 그곳은 '시네마테크'였으니까. 다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던 곳이다. 메가박스를 찾을 때 나는 늘 디지털 상영, 혹은 M관이나 1,2관과 같은 크고 안락한 상영관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그곳에서 애인과 시시덕거리며 팝콘을 통째로 없애버리는 것을 좋아하고, 상영 전 광고를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시네마테크의 의미는 그런 극장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그곳은 유일하게 영화라는 매체에 온전히 정신을 놓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시네마테크가 한국에서 사라진다면, 극장의 운영이 더이상 불가하다면, 나는 어디에 어떻게 다시 정을 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국에 다양성 상영관은 많지만, 그곳만큼 애정을 쏟고 정을 주었던 곳은 없었다. 그곳을 가지 않는 날은 나에게 '길티'였으니까.

나는 극장을 옹호하지 않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영화학도들, 그리고 이십대의 우리 또래들, 몇몇 다수의 그들이 찬양하는 '방 구석 모니터'의 전설을 믿지 않는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보다 개개인의 집구석에서 밝혀질 때, 그 가치가 살아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으니 굳이 극장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말, 그건 그냥 개소리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쏟아진다는 자체를 혐오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욕해도 상관없다. 영화는 극장에서 탄생했고 앞으로도 극장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부잣집에서 돌비 채널을 갖추고 초대형 스크린을 걸어 홈씨어터를 구비한다고 해도, 나는 그 장비들이 허름한 극장의 발 끝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어느 날 극장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그건 생각도 하기 싫다. 그곳은 '진짜' 영화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 시네마테크 시간표를 스윽 한 번 훑는다. 저 곳이 없어진다면 더이상 무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았던 날.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모니터로만, 텔레비젼으로만 훔쳐보다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만났던 날. 차이밍량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서 등 뒤로 서늘한 물줄기가 흐르는 경험을 해본 일이 있는지.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를 스크린으로 보며 러닝타임 세 시간 반이 넘어가는 바로 그 시점에서 희열을 느꼈다. 집에서, 강의실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그 무수한 경험들. 그런 모두의 경험들이 서려있는 곳이 극장이고, 그러한 경험의 역사가 이어지는 곳이 시네마테크다. 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의 존속과 존재를 믿는다. 설령 그것이 과거의 유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극장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필수불가결의 공간이다. 극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아야만 하며, 세기말 후 육지에 생존한 바퀴벌레처럼 관객을 사로잡아야 할 의무를 가진 공간이다. 그곳은 영화와 나, 그리고 영화와 당신, 단 둘이서만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