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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이야기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나를 성숙시키는 곳


*2009년 친구들영화제 웹데일리에 송고된 글입니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나를 성숙시키는 곳

시네마테크에 관한 단상


내게 있어 시네필이라는 말은 아직 너무나 멀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영화를 좀 열심히 본다고 누구나 시네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영화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동반한다. 장편영화로 치자면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다. 어떤 영화가 10년의 이야기를 하건, 10분 안에 이루어진 일들의 이야기를 하건 간에 관객은 자신의 시간을 영화에 투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당대 내노라하는 시네필로 불리는 선배들에 비해 영화를 본 물리적 시간 자체가 짧다. 나는 아직 이십대 초반이고 세상의 유혹이라는 핑계를 대며 영화에 시간을 많이 소요하지 못한 학생일 뿐이다.


프랑수와 트뤼포는 22살 까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써서 당시 프랑스 영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22살의 혈기에 썼기 때문에 조금 거친 문체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며 그의 열정과 용기를 하염없이 부러워한 적이 있다. 프랑스 나이로 하면 나는 이제 트뤼포와 동갑이 된다. 나는 영화에 대해, 영화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트뤼포처럼 배짱 좋게 소리칠 깜냥도 내공도 되지 않는다. 사실 고백하자면 깜냥은 고사하고 지금 쏟아지는 수많은 영상물 속에서 나를 다잡기도 어렵다.


2009년 서울에서 살아가는 내가 볼 수 있는 네모난 화면은 너무도 많다. 브라운관, 모니터, 전광판, PMP, 그리고 스크린까지. 이것은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영상물을 만날 매체가 다양해진 것을 뜻한다. 수많은 매체가 쏟아내는 수많은 이미지들, 상투적으로는 이를 '이미지의 홍수'라고들 한다. 집에서 TV리모콘으로 채널만 돌리고 있어도 케이블 프로그램을 통해 홈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듯 한 작은 영상물부터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여 만든 할리우드의 현란한 CG화면까지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질적으로 차이가 큰 이미지들이 단순히 채널이라는 대등한 위계로 나에게 다가온다. 난 이따금씩 춤추고 노래하는 어린 가수들의 몸짓에 머뭇거리기도 하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깨끗하고 화려한 화면에 매혹되기도 한다. 이렇게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내 마음은 아무리 다잡으려 해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시네마테크는 이런 환경에 갇힌 내가 찾아가는 유일무이한 곳이다. 고전을 향유한다는 것, 고전 속에서 현재를 살기 위한 보는 눈을 기른다는 것. 난 그것을 시네마테크에서 보고 배웠다. 이런 말은 짐짓 진부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진리에 가깝다. 시네마테크에 가면 고민 고민하고 공을 들여 찍어 놓은 수십년 혹은 십수년전의 이미지들이 내 눈 앞에서 춤을 춘다. 동시에 내 마음에도 자막이 뜬다. “그래, 이게 영화잖아”라고. 네이트온 메신저에서 치면 파란 줄이 그어지며 뜨는 그토록 흔하고 유동적이던 ‘영화'라는 단어는 시네마테크에서는 고정적인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영화에 대한 내 편협한 감정과 사랑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시네마테크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시네마테크에서 보았던 영화들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때로는 학교에서보다 더 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고다르 후기작들이 던졌던 삶과 전쟁에 대한 질문을 받아들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로메르가 작품을 통해 한수 가르쳐준 연애기술은 나름 실생활에도 써먹을(?) 혹은 써먹고 싶을 만한 기술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나에게 있어 시네마테크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하는 단연 성숙의 공간이다.


그리고 내게 또 다른 의미로 시네마테크가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시네마테크에는 늘 친구들이 있다. 굳이 약속을 하지 않아도 늘 극장에 가면 거기엔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생겼다는 생각에 말 한마디를 더 하지 않아도 이상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영화를 같이 보았고 그렇게 그곳에 함께 있었던 거다.


내게 있어서는 배움터이며 안식처고 만남의 광장이기도 한 시네마테크에서 나는 올해까지 2년째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웹데일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친구들 영화제에서 일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 느낀다. 이 일을 통해 새로운,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으니. 친구들 영화제가 열리는 겨울마다 시네마테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복작거렸고 재미난 영화들이 풍성했다. 영화제에서 나를 포함한 데일리 친구들이 한 작업 중에는 주로 감독, 배우들이 자신이 추천한 영화에 관해 관객과 함께 얘기하는 시네토크를 정리하는 게 많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말을 글로 옮겨내는 단순한 녹취풀기가 아닌가 싶은데 그 자리에 그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보면 그건 단순한 녹취풀기, 그 이상이라는 걸 금방 알아채게 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한번 배웠다면, 더 많이 고민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더 배울 수 있는 배움의 배가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영화가 끝나 극장 밖을 나서면 별이 박혀있는 밤하늘 아래서 영화와 영화를 추천한 사람들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한마디 더 덧붙였다. 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무슨 이야기든 더 하기 위해 종종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며 매 순간 영화만을 추억한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내겐 너무나 황홀했던 시간이다.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난 그 겨울의 시간들을 황홀함을 느낄 만큼 찬란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봄이 되면 개강을 하고 난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이젠 어엿한 3학년이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시네마테크에 오기 시작했으니 난 학교와 시네마테크를 동시에 다니기 시작한 셈이다. 언젠가는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 딱지를 떼고 다시 학교에 갈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네마테크는 다르다. 내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거나 상관없이 여전히 들락거릴 것이다. 더 불어난 이미지의 홍수에 갈피를 못 잡을 때면 또 시네마테크에 와서 영화를 보고 ‘이게 영화야’라고 되뇔 것이다. 혹은 영화를 보고 붕 떠서 아쉬운 마음에 함께 영화를 본 어떤 친구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시네마테크 전용관인 서울아트시네마의 위기설이 나도는 등 정말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무겁다. 이제 불어올 봄바람이 이 무거운 마음을 가셔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이루어져 늘 바로 이 곳, 여기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