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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외부 기사

[네오이마주] 오늘의 시간, 오늘의 아트시네마 ②

*이 글의 저작권은 네오이마주에 있습니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와 어느 cf 감독과 어느 미대생으로부터의 이야기

 

2008년 2월 28일 현재 아트시네마를 지키는 서명운동은 1000명 목표에 약 500명 정도로 모였다. 네오이마주의 강민영 스탭은 인터넷에서 공용 티스토리 블로그가 만들어서 운영 중이고, 서울아트시네마 공식 카페에서 인터넷으로도 서명에 관한 서류를 배포하면서 접수를 받고 있다. 서명을 하는 인원이 약 1000명으로 잡은 것은 아트시네마가 적지만 고유한 인원으로 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아트시네마에서는 사활에 도움을 주는 1천명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매튜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모르니 줄기차게 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는 구별짓기 어렵다. 저마다의 생성배경과 창작의 배경이 다른 만큼 영화의 내적인 면 이외에도 외적인 맥락까지 더해서 저마다의 의미는 있는 셈이다. 영화 자체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면모와는 다르게,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제시했던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꼭 따르지 않더라도 분명 영화들은 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영화는 단지 걸려있는 것, 장소를 제공하는 법만이 아니라 그것을 상영하는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아트시네마의 사활에 대한 논의를 한 토요일 저녁, 종로를 벗어나 홍대의 한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 모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한 작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그 영화는 상업적으로나 작품성 측면으로나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영화를 토대로 주인공들은 영화계에서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던 전력을 지녔다. 그 작가는 그 시나리오를 내놓고는 영화판에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고서는 곧장 유학을 떠나 미디어아트계통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몇명의 학생들이 "선생님은 영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작가는 "아니. 나는 영화를 사랑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번의 기획회의를 거치고 난 뒤 자신의 영화가 '소재만 바뀌었을 뿐 구성은 동일한' 영화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겪으며 심적으로 난항을 겪었으며, 자신이 미디어아트에 손대는 것은 영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영화를 두고 '타인의 자본으로 만드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실험성과 도전성, 혹은 과감한 영상적인 시도는 무책임하다. 영화보다는 미디어아트가 보다 예술의 계통에 더 가깝고, 그러므로 창작에 있어 더 자유로운 측면은 있다. 그러나 시사하는 바는 비도전적인 영화를 통해서 맛없는 영화를 만드나마 맛있는 영화를 위해서 보다 책임을 질 만큼의 능력을 기르는 측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명이 긴 영화를 보는 건 영화가 가진 원형적인 맥락을 이어가는 것으로 유효하다. 고전이 문고판으로 지속적인 제본을 해오는 맥락과 클래식 음악도 지속적으로 변주를 해가며 오늘의 음악에 영향을 주는 것 까지 마찬가지이다.

모 cf 감독 출신 영화감독은 영화계에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cf 출신은 영화를 제대로 못만든다는 얘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것이 무슨 말일까. 미셸 공드리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적인 문법이 있고 문법을 지킨 영화와 문법을 지키지 않는 영화가 있다. 과거 미국의 20년대 30년대 포르노 영화는 영화취급도 받지 못했지만 약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과거 미국의 실내 건축 연구라는 테마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요컨대 제대로 만드는 관점이란 것의 절대성에 관해서는 의문을 표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제대로 만든 영화'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영화적인 눈을 재확인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게 더 나은 말이다.

도전적인 발언이나, '모든 영화는 평등하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관해서는 평가적인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영화를 두고 평론을 하든 영화를 자료로 삼든 영화를 만들어가든 간의 과정에서 평가에 의한 담론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러티브적인 맥락 뿐만이 아니다. 영상에 의한 효과와 영상에 대한 촬영과 편집 등이 모두 유효하다. 그것을 배우려면 영화과에 가야하는 것일까. 영화에 관심이 생긴 대중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이명세 감독의 <형사-Duelist>와 을 보고나서 그 영상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렴풋하게 느낀 어느 미대생의 호기심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서울 아트시네마는 단순한 상영관의 수준을 넘어서 교육효과와 담론을 낳는 효과도 자아내고 있다. 그 규모는 낙원상가 4층의 규모만이 아니라 보다 큰 커뮤니티적인 맥락으로 승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영화와 영화관이 돈 앞에 무력해지는 것은 영화가 '자본을 두고 하는 예술'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cf 감독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 아니면 돈을 왜 쓰는 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제품 cf를 찍기 위해 모델과 모델이 입을 옷과 무대 셋팅과 조명과 카메라 등과 관련한 장비만 있으면 되지, 그것을 해내기 위한 제반 환경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설명이다. 칸느 국제광고제에서 수상한 작품 치고 한국처럼 스타 캐스팅으로 미소와 제스츄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짠! 하고 나타나는 형태는 없다.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멀티플렉스의 극장에서는 "영화 많이 사랑해주시구요, 많이 보러와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배우가 아트시네마의 상영관에서는 관객과 진지하게 문답을 주고 받는다. 아트시네마의 규모가 면밀한 대화를 하기에는 큰 편이므로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문답은 활자로 기록되고 발간되는 등의 영향력을 갖는다. 문화는 당장의 효용을 산출해내지는 않으나, 시대의 혈류를 타고 구석구석 양분을 전달해준다. 문화도시는 '문화'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내걸지 않는다. 광장과 담론과 창작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역사가 쌓여 형성이 되는 공간이다.

앞으로의 서울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설 공간이 된다. 약 2100년이 되면 세계의 마천루의 중심지가 아시아로 옮겨온다고 한다. 마천루? 좋다. 마천루의 끝에서 바라볼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문화도시였으면 좋겠다. '문화'라는 활자를 현수막에 내건 도시가 아니라, 진정어린 문화도시로 살기도 좋고 살아가는 이유도 매순간 찾아낼 수 있는 도시이길 바란다. 그리고 낙원상가의 4층, 아트시네마의 영화에서 2000년대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게 더 낫겠다. 전통과 현대의 괴리가 아닌 공존을 보장하려면 말이다.





 

* 티스토리 블로그 : http://notrecinema.tistory.com/
* 아트시네마 카페 서명 다운로드 :
http://cafe.naver.com/seoulartcinem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13

 

2009.03.01
서유경(편집스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