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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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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해서...
by cinequanon

'네오이마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3.03
    [네오이마주] 이제는, 우리가 칼을 갈 차례
  2. 2009.03.03
    [네오이마주] 오늘의 시간, 오늘의 아트시네마 ②
  3. 2009.03.03
    [네오이마주] 오늘의 시간, 오늘의 아트시네마 ①
  4. 2009.02.27
    [네오이마주] 우리들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를 지켜라!

*이 글의 저작권은 네오이마주에 있습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시네마테크 위탁사업의 공모제 전환이 1년 뒤로 연기되었다.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다. 표면에 내세운 시행 연기의 이유가 ‘시기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영진위 임의로 시네마테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변화가 없음을 의미하고, 공모제로의 전환을 기정사실화하겠다는 방침을 명문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공포탄을 쏘겠다는 심산이었는지 모른다. 원래 첫발은 공포탄이고 실탄 사격은 두 번째부터 아니던가. 언제라도 지원을 끊을 수 있으니 딴 맘 품지 말고 알아서 기라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공모제라는 단어 하나만 던져놓았을 뿐인데, 서울아트시네마와 친구들 영화제를 뒤흔들어놓을 만큼 파급력이 컸다는 점만 놓고 보면 문화체육관광부나 영진위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자평할 수 도 있겠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이 땅의 행정가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태도와 소양의 천박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문화예술마저 자본의 발아래 둘 수 있다는 놀라운 발상의 결과물을 목도했다. 또한 다수의 언론 매체가 보여준 무신경한 반응은 철저하게 네티즌의 기호에 의존하고 있는 영화 담론의 현주소를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물론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울아트시네마와 관객들은 침착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시네마테크를 지켜내는 힘은 관객으로부터 나올 수 있음을 입증하였고 서울아트시네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집된 힘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한편 이번 사태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재정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전체 예산의 30%에 불과하지만 영진위의 위탁사업지원금이 없으면 시네마테크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 재정자립의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현재의 서울아트시네마는 (약으로 말하자면) 비타민과 당위정이 골고루 들어있는 처방전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서울아트시네마를 사랑하는 관객의 힘이 비타민이라면 재정자립을 위한 안정적 재원확보는 당위정에 해당할 것이다. 제 아무리 애정 가득한 관객의 지원이 차고 넘친다 해도 그것만으로 버틸 수는 없는 법. 누구보다 극장 측이 더 많이 고민하고 지혜를 짜내고 있을 것일 터이지만, 시네마테크 공모제전환 반대 서명운동과는 별개로 후원회원을 배가시키는 데 힘써야 할 것이고, 언론과의 유기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우호적 지원군을 확보하는 일에도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며 선량한 후원자를 찾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각계각층을 망라한 실질적인 도움과 지원이 절실한 때라는 얘기다.

어느 정치인의 말대로, 기나긴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지난 몇 주간이 목검으로 상대와 합을 맞춰보며 서로의 내공을 시험해본 시간이었다면 바야흐로 진검승부의 시간이 도래하였다. 진검승부를 앞둔 무사에게 녹슨 칼은 무용지물일 터. 칼은 무사만 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몇몇 언론과 매체만이 시네마테크문제를 공론화하며 칼끝을 세웠다면, 이제야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나서서 칼을 갈 차례다.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합심하여 갈아 놓은 칼을 든 장수가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번 주말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인 ‘필름라이브러리 무료상영회’는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니 이번 주말, 서울아트시네마로 달려가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관객회원에도 가입하자. Now, Were going to Seoul Art Cinema!

 

 

2009.03.03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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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네오이마주에 있습니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와 어느 cf 감독과 어느 미대생으로부터의 이야기

 

2008년 2월 28일 현재 아트시네마를 지키는 서명운동은 1000명 목표에 약 500명 정도로 모였다. 네오이마주의 강민영 스탭은 인터넷에서 공용 티스토리 블로그가 만들어서 운영 중이고, 서울아트시네마 공식 카페에서 인터넷으로도 서명에 관한 서류를 배포하면서 접수를 받고 있다. 서명을 하는 인원이 약 1000명으로 잡은 것은 아트시네마가 적지만 고유한 인원으로 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아트시네마에서는 사활에 도움을 주는 1천명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매튜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모르니 줄기차게 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는 구별짓기 어렵다. 저마다의 생성배경과 창작의 배경이 다른 만큼 영화의 내적인 면 이외에도 외적인 맥락까지 더해서 저마다의 의미는 있는 셈이다. 영화 자체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면모와는 다르게,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제시했던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꼭 따르지 않더라도 분명 영화들은 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영화는 단지 걸려있는 것, 장소를 제공하는 법만이 아니라 그것을 상영하는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아트시네마의 사활에 대한 논의를 한 토요일 저녁, 종로를 벗어나 홍대의 한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 모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한 작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그 영화는 상업적으로나 작품성 측면으로나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영화를 토대로 주인공들은 영화계에서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던 전력을 지녔다. 그 작가는 그 시나리오를 내놓고는 영화판에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고서는 곧장 유학을 떠나 미디어아트계통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몇명의 학생들이 "선생님은 영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작가는 "아니. 나는 영화를 사랑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번의 기획회의를 거치고 난 뒤 자신의 영화가 '소재만 바뀌었을 뿐 구성은 동일한' 영화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겪으며 심적으로 난항을 겪었으며, 자신이 미디어아트에 손대는 것은 영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영화를 두고 '타인의 자본으로 만드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실험성과 도전성, 혹은 과감한 영상적인 시도는 무책임하다. 영화보다는 미디어아트가 보다 예술의 계통에 더 가깝고, 그러므로 창작에 있어 더 자유로운 측면은 있다. 그러나 시사하는 바는 비도전적인 영화를 통해서 맛없는 영화를 만드나마 맛있는 영화를 위해서 보다 책임을 질 만큼의 능력을 기르는 측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명이 긴 영화를 보는 건 영화가 가진 원형적인 맥락을 이어가는 것으로 유효하다. 고전이 문고판으로 지속적인 제본을 해오는 맥락과 클래식 음악도 지속적으로 변주를 해가며 오늘의 음악에 영향을 주는 것 까지 마찬가지이다.

모 cf 감독 출신 영화감독은 영화계에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cf 출신은 영화를 제대로 못만든다는 얘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것이 무슨 말일까. 미셸 공드리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적인 문법이 있고 문법을 지킨 영화와 문법을 지키지 않는 영화가 있다. 과거 미국의 20년대 30년대 포르노 영화는 영화취급도 받지 못했지만 약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과거 미국의 실내 건축 연구라는 테마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요컨대 제대로 만드는 관점이란 것의 절대성에 관해서는 의문을 표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제대로 만든 영화'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영화적인 눈을 재확인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게 더 나은 말이다.

도전적인 발언이나, '모든 영화는 평등하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관해서는 평가적인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영화를 두고 평론을 하든 영화를 자료로 삼든 영화를 만들어가든 간의 과정에서 평가에 의한 담론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러티브적인 맥락 뿐만이 아니다. 영상에 의한 효과와 영상에 대한 촬영과 편집 등이 모두 유효하다. 그것을 배우려면 영화과에 가야하는 것일까. 영화에 관심이 생긴 대중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이명세 감독의 <형사-Duelist>와 을 보고나서 그 영상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렴풋하게 느낀 어느 미대생의 호기심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서울 아트시네마는 단순한 상영관의 수준을 넘어서 교육효과와 담론을 낳는 효과도 자아내고 있다. 그 규모는 낙원상가 4층의 규모만이 아니라 보다 큰 커뮤니티적인 맥락으로 승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영화와 영화관이 돈 앞에 무력해지는 것은 영화가 '자본을 두고 하는 예술'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cf 감독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 아니면 돈을 왜 쓰는 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제품 cf를 찍기 위해 모델과 모델이 입을 옷과 무대 셋팅과 조명과 카메라 등과 관련한 장비만 있으면 되지, 그것을 해내기 위한 제반 환경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설명이다. 칸느 국제광고제에서 수상한 작품 치고 한국처럼 스타 캐스팅으로 미소와 제스츄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짠! 하고 나타나는 형태는 없다.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멀티플렉스의 극장에서는 "영화 많이 사랑해주시구요, 많이 보러와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배우가 아트시네마의 상영관에서는 관객과 진지하게 문답을 주고 받는다. 아트시네마의 규모가 면밀한 대화를 하기에는 큰 편이므로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문답은 활자로 기록되고 발간되는 등의 영향력을 갖는다. 문화는 당장의 효용을 산출해내지는 않으나, 시대의 혈류를 타고 구석구석 양분을 전달해준다. 문화도시는 '문화'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내걸지 않는다. 광장과 담론과 창작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역사가 쌓여 형성이 되는 공간이다.

앞으로의 서울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설 공간이 된다. 약 2100년이 되면 세계의 마천루의 중심지가 아시아로 옮겨온다고 한다. 마천루? 좋다. 마천루의 끝에서 바라볼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문화도시였으면 좋겠다. '문화'라는 활자를 현수막에 내건 도시가 아니라, 진정어린 문화도시로 살기도 좋고 살아가는 이유도 매순간 찾아낼 수 있는 도시이길 바란다. 그리고 낙원상가의 4층, 아트시네마의 영화에서 2000년대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게 더 낫겠다. 전통과 현대의 괴리가 아닌 공존을 보장하려면 말이다.





 

* 티스토리 블로그 : http://notrecinema.tistory.com/
* 아트시네마 카페 서명 다운로드 :
http://cafe.naver.com/seoulartcinem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13

 

2009.03.01
서유경(편집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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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네오이마주에 있습니다.

 

 


1. 누구의 시간도 거꾸로 가지 않는다.


최근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영관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상영되고 광장에서는 오늘의 한국이 지난 세월로 되돌아간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 누구도 시간을 건드릴 수는 없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끌어감에 있어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드러나는 시간성을 잠시 밝혀두어야겠다. 영화에서는 '시간'을 소재로 했으나 소재로의 접근 방법은 바로 인간의 삶을 낯설게 보는 행위다.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 벤자민에서부터 아기의 모습으로 죽어간 노인 벤자민을 통해 이 영화의 서사와 사건은 유발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꾸로 가는 것은 세포의 활동이고 그것은 벤자민을 특이점으로 남겨둔다.

흥미로운 것은 벤자민의 시간 역시 여주인공 데이지를 비롯한 여타 인간들의 시간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몸은 시간에 따라 변해간다. 노인의 세포에서 젊은이의 세포로의 '귀화'라기보다는 '성장'에 가깝다. 또한 삶의 생애까지 선형적인 방식에 의해 '나이듦'에 따라 죽는데, 벤자민의 경우에는 그것을 다룰 개념이 '나이듦'과 '더 이상 어려질 수 없음'의 경계에서 죽음을 다룬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벤자민의 특이점의 의미가 전반에 드러난다. 벤자민은 보통의 인간이라면 낯설지 않을 환경을 낯설게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속도감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데 영화에서 벤자민의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서의 영화 내 시간의 속도감의 차이는 확연히 두드러진다. 유년기에는 같은 집에 사는 노인들의 일상과 죽음에 많은 포커스가 맞춰진다. 시간적인 흐름과 공간적인 스케일 면에서 가장 협소하고 밋밋할 수 있는 시기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이후 나이가 들면서 점차 가속도가 붙는데, 그것은 시간을 잘라내는 편집으로 점프를 하는 수준으로 된다. 벤자민의 유년에 관해 관심이 많다기 보다는 낯선 상황에 가장 낯설음으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말한다. "당신이 마흔 아홉, 내가 마흔 셋. 이제 우리는 딱 맞는 나이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아름답게 묘사되는데, 그것은 마치 서로 기울기가 대칭관계인 두 직선과도 같다. 단 교점이 생성되는 까닭은 각개 직선이 서로에게서 영향을 받아 방향을 뒤틀지 않는 개별적인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을 거스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실제로 시간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같은 시간 속에서 그것을 낯설게 볼 수 있는 특이점을 잡고 삶에 관해 매 시기마다의 화두를 던진다. 이 시기에 왜 이것을 하지 않았을까, 혹은 나는 지난 시간을 왜 그렇게 보냈을까.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각 개인의 삶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한다. 벤자민이 러시아의 숙박소에서 만났던 부인이 지난 날 해협 횡단에 실패했고, 이후 해협 횡단에 성공한 것 처럼.

그렇다면 이제 시간성 자체의 속성에 관해 절대시간과 상대시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절대시간 자체는 건드릴 수 없다. 이 시간 속에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물음이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이 면밀히 엮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왜 살아가고 있을 지에 관한 것을 생각하면 그것들이 묶여내 진행되는 것이 오늘에 관한 상대시간일 것이다. 오늘의 시간, 곧 나는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는 '어떤'이라는 속성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겠다.

 



 

2. 나는 왜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지각쟁이 유경씨의 하루.

2월 28일, 토요일. 쾌청한 날이었으며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햇살이 나긋했다. 지난 추운 계절 속에서 폐간된 영화잡지를 읽지 못하는 날이며, 오후 2시 반 무렵에는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는 아트시네마의 앞으로 나아갈 길에 관한 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501번 버스가 한강대교를 원활히 지나지 못하고 교통이 꽉 막힌 상태로 대교에서만 10여분을 보낸 토요일이기도 하다. 곧 이을 오후 여섯시가 되면 국민 오락프로그램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의 재미있고 친근한 <무한도전>이 방영된다. 본방송으로도 보지 못한다면 인터넷 상영으로라도 볼 것이다. 나의 토요일은 이렇듯 별다를 것이 없지만, 그러나 나는 왜 이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늘어지는 설명일지는 모른다만은 짚어보겠다. 지난 집회시기를 지나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는 전경들이 토요일마다 나온다. 언론재단 건물 앞 버스정류장 근처와 청계광장 주변에는 전경버스가 서 있고 그로 인해 버스는 정류장에서 정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도로에서 정차를 한다. 버스가 서고 멈추는 범주에 따라 도로는 진행됐다가 멈추는 파동을 탄다. 그 탓에 광화문과 청계광장에서 북쪽 방향으로는 차가 막히는 기색이 없으나 그 남쪽으로는 도로 교통이 혼잡스럽다. 서울역이나 용산, 혹은 그 이남의 한강대교, 상도터널로 이어지는 동작구와 관악구의 현장에서는 왜이리 차가 막히는지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라거나 '토요일 오후라서 그래'라며 애꿎은 시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평소의 거의 2배가 되는 시간동안 버스에 있어야 했고 아트시네마로 함께 가기로 한 친구를 먼저 보내야 했다. <무한도전>의 멤버들 정신감정을 하기로 하는 예고편을 보면서 '이야, 재밌겠는데?'라는 기대감으로 혼자 느긋하게 식사를 한 다음 청계천 변 광교를 걸었고, 동아일보사의 현판에 걸린 '기습 공격을 당한 전여옥 의원'의 기사가 신문 1면에 걸린 것을 봤다. 왼쪽 눈이 깊숙하게 다친 전 의원의 사진을 유심하게 본 뒤 다시금 청계천 변을 통해 하늘을 바라본다. 우울한 생각을 하기에는, 오늘의 이 시간이 참으로 아깝지 않느냐는 생각.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컴퓨터를 꺼낸 것이다. 오늘의 시간을 서술하기에는 매우 많은 사연들이 있으나 그 중 가장 큰 핵심요약어는 고통이다.

2007년의 3월의 학교의 저널에서 한 학생 기자가 베를린으로 건너가 송두율 교수를 인터뷰했다. (http://www.snujn.com/article.php?id=1405 ) 그는 지난 대선을 두고 "일단 급하다고 짠 바닷물을 마신 격"이라고 표현했다. 그 시간은 오늘로 대치가 됐고 그것은 "도덕이 밥 먹여주냐"는 논리는 "도덕이 있어야 밥도 제대로 먹는다"는 말을 되새기게 해준다. 방송국 파업에서도 마찬가지다. 501번 버스가 지나온 용산 일대에서도 드러난다. 큼직한 유리가 몸으로 파고들어오는 듯한 아픔이다. 2008년 2월은 '기습'으로 시작해 '기습'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아트시네마가 순식간에 '세입자'의 현실로 마주하고 2월 26일에는 우황청심환 한 알이 국회의 정의보다 앞서 미디어 법안을 상정하고야 말았다. 2월은 끝나도 시간은 끝나지 않는다.

시간은 끝나지도 않고 재생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통은 재생된다. 오늘날 방송국의 현실에 떨떠름해 하고 대학간 순위 경쟁과 앞으로 부닥칠 수많은 것들에 관해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곧 이어 <무한도전>을 보러 갈 것 이다. 분명 나는 누가 제일 못났나, 누가 제일 덜떨어졌나를 보며 박장대소할 것이다. 내일은 <패밀리가 떴다>를 보며 잠자리 '순위'를 매기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언제 어떤 불행이 올 지 예측하지 못할 두려움을 <1박 2일>의 복불복 게임을 통해 내 일이 아닌양 생각하게 될 것이다. 가장 못난 사람이 모든 걸 감수하는 것 자체로 웃는 것이 코미디로 통하는 속에서 오늘을 보낸다. 웃게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오늘을 이렇게 보낸 까닭을 유기적으로 이어보려 했으나, 이것이 모두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글을 마치기로 한다. 곧 이어 아트시네마 포럼도 끝난다. '아트시네마의 친구들 데일리'를 통해 '어떻게'에 관한 소식들이 따끈따끈하게 전해질 것이다. (계속)

 

 

2009.02.28
서유경(편집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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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저작권은 네오이마주에 있습니다.



지난 1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즈음하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시네마테크사업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안이 첨예하고 민감한데다가, 사실 확인이 모호한 상황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에 이 내용은 의도적으로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다름 아닌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변경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쉽게 설명하면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미디어 센터 ‘미디액트’와 더불어 영화진흥위원회의 위탁사업 수행기관 중 하나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공간 임대료를 비롯한 기자재 구입비와 운영비는 이처럼 정부지원금으로 조달되어왔고 이것이 서울아트시네마 전체 운영비의 3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위탁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계약 갱신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영진위나 문화관광체육부가 출연한 기금으로 설립 운영되어온 기관이 아니다.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만들고 이어져온 민간 기관이라는 것. 다만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위탁사업의 형식을 통해 운영자금의 일부를 지원해왔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민간이 시작해 힘들게 꾸려온 사업에 정부는 단지 위탁이라는 미명하에 운영비 일부를 지원해주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빌미로 이제 와서 그 사업의 주체를 자기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 논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뒤에 거듭 말하겠지만, 자칫 영진위가 시도하는 공모제가 시네마테크전용관의 주체를 선정하기 위한 꽤나 정당하고 투명한 절차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울아트시네마가 공모에 참여할지, 어떤 주체가 추가로 공모에 참여할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손 놓고 안이하게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돌아가는 정황이 석연치 않다. 황급히 글을 쓰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래, 솔직히 고백한다. 이것은 선방이다.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피니시 블로우가 아닌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잽을 날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전혀 쓸모없는 기우에 불과했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심으로 내가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 우스운 인물이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정부사업에서의 수의계약은 잡음을 만들어내기 일쑤였다. 특혜 시비와 부적격자 선정에 따른 부실문제가 뒤따랐고 여기에는 검은 돈 또는 외압이 개입되기 마련이었다. 공모입찰제로 바꾸고 공개경쟁을 통해 사업의 내실을 기하는 풍토가 확산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사업권자 선정 방법만 바뀌었을 뿐, 공모입찰제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순진한 입찰자들은 자신들이 결정과정의 합법성을 증거 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야만했다. 결국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도가 아닌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와 사람에 있었다. 

영진위의 시네마테크 사업권자의 공모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영진위는 “모든 위탁사업을 공모제로 전환하라”는 문광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문광부의 주장은 이와 사뭇 다르다. “문광부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고 지침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어느 쪽의 말이 맞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제까지 민간 주도하에 운영해 온 시네마테크를 공모에 붙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데 있다.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사업의 주체가 아니라 그 알량한 정부지원금의 대리 집행기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공모제로 전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컨대 민간사업에 정부가 관여하여 간섭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아트시네마 측이 항변하자 영진위는 “어차피 공모할 주체가 없으니 빨리 응모할 수 록 서울아트시네마에 유리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설득하려 했다. 이 말은 마치 서울아트시네마 이외에 시네마테크전용관 위탁사업을 수행할 만한 자질과 경험을 가진 단체가 없어 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제를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행정처리지침의 일환이요, 요식행위이니 서류만 제출하면 끝날 일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영진위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특정 단체가 공모하고 심사 결과 서울아트시네마가 공모에서 탈락한다면? 결과는 간단하다. 지금의 장소에 머물 명분이 없으니 현재의 형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만약 다른 단체가 공모한다면 어떤 곳일까? 현재로써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표면상 드러난 주체가 없는 마당에 섣부른 추측은 위험하다. 하지만 가늠되는 것이 없지도 않다. 사실 2008년 이후 영화계 일각에서는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에 대한 사업권자 교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곤 했다. 세간에서는 현재의 서울아트시네마를 대체할 사업자로 특정 단체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었다.

 

이쯤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간 서울아트시네마가 펼쳐온 사업을 그 화려한 고전의 향연을 지금 그 어떤 단체가 순조롭게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물론 나 역시 서울아트시네마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지극히 순진하고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업자 선정의 대상이 아닌 것을 가지고 논박하는 것은 상대의 술책에 말려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분명이 알아야 할 것은, 시네마테크전용관은 영진위의 산하 기관도 아닐 뿐더러 공모를 통해 선정되기만 하면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지난 7년간 해온 사업을 되살펴 볼 필요도 없이, 이제껏 우리들이 보아온 시네마테크는 비록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처럼 방대한 아카이브를 구성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간의 프로그램과 상영실적에 있어 시네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무던히 애써왔다. 또한 고전 걸작의 상영에 그치지 않고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을 소개하고 지원해왔으며 교육기관과의 연대를 통한 고품격 영화문화의 창달에도 힘써왔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을 통해서 뿌리내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은 지금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때문에 오직 서울아트시네마만이 시네마테크의 주체이고 이것이 이 논란의 부질없음을 증명하는 이유가 된다. 

문화예술이란 것이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0년의 진보정권 시절 보수ㆍ우익 예술인이 상대적으로 소외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좌우 이념 논쟁을 부추기는 언론플레이로 ‘실리’를 챙기겠다는 ‘꼼수’를 부렸던 이들이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까지 노린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영화계에 발붙이고 있는 이들이 행할 도리가 아니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관객의 욕구에 부합할 만한 영화를 찍을 자신이 없으니까, 뱃속 편하게 고전영화나 틀면서 추억에 젖겠다는 건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세월까지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문화헤게모니는 그런 경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한국영화가 걱정스럽고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면, 빈약한 논리로 한 풀이를 도모하기 이전에 영화를 찍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모름지기 감독이란 영화로 말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럼에도 허황된 욕심이 피워내는 고약하고 불온한 냄새가 진동하니 그래서 노탐(老貪)이라고 하는 거다.


영화광이라면 저마다 자신의 영화적 고향 또는 모태로 삼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70.80년대의 영화광들이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거점삼아 영화의 사회성을 고민했다면, 90년대의 영화광들은 문화학교서울(현재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터득했고, 이후 세대들은 시네코아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영화전용관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신의 영화적 소양을 쌓아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웠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울아트시네마는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다. 사당동에서 소격동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영화지망생들이 꿈을 키워온 성소(聖所)에 다름 아닌 곳이다. 비록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격변의 시기일지라도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의 주체만큼은 특정집단의 입김과 이념의 제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영진위의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 공모 계획은 전면 백지화 되어야 한다.


시네마테크는 문화헤게모니의 거점이 아닌 문화유산이요 영화의 거처이고 기억의 장소이다. 이것이야말로 단순하지만 거대한 진실이다. 정녕, 문화관광체육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앙리 랑글루아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관장 직에서 해임했던 앙드레 말로의 전철을 밟겠다는 것인지, 지켜 볼 것이다.

 


 

2009.02.16
백건영(영화평론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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